OPEN NOTE 열린옷장 생각노트


[열린옷장 독서클럽_11회차 후기] 싯다르타

이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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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서모임이 어느덧 10회차를 넘어가면서 한 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독서모임은 원래 이렇게 하는 건가? 다른 사람들은 독서모임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 우리는 매번 비슷한 이야기만 하다 헤어지는 건 아닌가?

 

지금 이대로도 괜찮나? 의문이 든 건 비교군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독서모임을 처음 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이번에 ‘민음사TV의 세문전 독서클럽’과 같은 책을 읽고 그들의 포맷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사실 어떤 책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고 타 독서모임의 분위기를 살펴보자는 정도였다.

 

#2

하지만 결정된 책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인 만큼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떠난 수행길에서 싯다르타는 여러 인물과 만나며 자신을 뒤흔드는 인생의 역경을 차례로 마주한다. 고빈다, 고타마, 카말라, 카마스바미, 바수데바, 아들, 그리고 다시 고빈다. 각각의 만남에서 싯다르타는 욕망하고 번뇌하고 공허했다가 무상을 거쳐 명상과 수련을 통해 소아를 버리고 옴을 찾는다. 그렇게 윤회의 진리를 깨달은 싯다르타는 열반에 든다.

 

삶의 지혜를 통달한 인물의 생애를 다루는 아주 많은 내용이 담겨 있는 책이다 보니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 바가 다르다고 하던데 요즘의 나에게는 이 구절이 가장 와닿았다.

 

푸른 것은 푸른 것이었고 강물은 강물이었다. 그리고 비록 푸른 것 속에, 강물 속에, 싯다르타 속에, 유일한 신적인 무엇이 감추어져 살아 있다 해도, 여기 노란빛, 여기 푸른빛, 저 하늘, 저 숲, 여기 싯다르타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곧 신적인 것의 방식이요 의미였다. 의미와 본질은 사물의 뒤쪽 어딘가가 아니라, 사물 속에, 만물 속에 존재했다.

 

흔히 내면이나 본질은 표면과 달리 고귀하고 숨겨져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결국 그 자체라는 말은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어떤 물건, 어떤 사람, 어떤 말, 어떤 것이라도 어린아이가 대하듯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특히나 말에 어떤 숨은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어쩌면 비꼼이나 악의일 것이라는 부정적인 의심을 버리고 순수하게 바로 듣자. 검증되지 않은 것에 구태여 의미를 부여하여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은 하지 말자.

 

#3

세문전 독서클럽도 형식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책 선정 이유/ 작가 및 줄거리 소개/ 이야기 나눌 주제 한두 가지/ 인상 깊었던 구절/ 소감의 구성이다. 다만 이번 시도를 통해 모임마다 자기들만의 결이 있겠구나 하는 것만은 확실히 느꼈다.

 

주제 중에 사랑, 돈, 가족 중에 가장 큰 고난은? 이라는 질문이 있었다. 질문만 두고 먼저 이야기를 나눈 우리 그룹은 자못 진지했는데 의견을 나눈 뒤 세문전의 영상을 보고 나자 살짝 맥이 빠졌다. 우리는 대부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뜻에서 가족을 꼽은 반면, 세문전은 내가 해보니 사랑, 돈, 가족이 힘들더라는 경험담이 골고루 나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같은 질문이라도 전혀 다른 감상이 오갈 수 있다는 것을 체감한 것이 이번 시도를 통해 얻은 성과인 듯싶다.

 

#4

전자책으로 읽는 사람, 종이책으로 읽는 사람, 책에 밑줄을 긋는 사람, 내용을 종이에 쓰며 정리하는 사람, 인덱스탭으로 표시하는 사람, 인물 관계도를 직접 그려보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 등 독서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그래도 독서모임을 앞두고 생각을 정리할 때는 모두 같은 고민을 하리라고 예상해 본다. ‘내 생각을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 하고 싶었던 말이 있는데 여럿이서 얘기하다 보면 순서가 밀리거나 타이밍을 놓쳐 못할 때도 많다. 막상 차례가 되면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 내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불안하다. 그래도 잘 설명하려고 노력하면서 손도 막 열심히 움직여 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 마음에 공감하며 경청한다. 이게 독서모임의 매커니즘 아닐까.

 

혼자 읽어도 되는 책을 굳이 모여서 함께 읽는 건 맞고 틀리고보다 서로 이해한 바를 조율하고, 어느 누구도 나와 똑같지 않음을 받아들이며 또 다른 신세계를 발견하는 맛에 있다고 본다. 앞으로도 이 독서모임이 유난히 지친 날에 땡기는 엽떡 같은 존재가 되기를!

 



#모임원 감상문

 


가연

싯다르타는 진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을 잃는다. 스승의 가르침으로는 결코 자신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속세에서 그는 부와 사랑, 쾌락을 경험하며 한때 경멸하던 세계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곳에서 완전한 존재가 된다.

 

‘그 죄인의 내면에는 지금 그리고 오늘 이미 미래의 부처가 깃들어 있다’는 싯다르타의 말처럼 죄와 부처, 과거와 미래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이라는 단일한 순간에 함께 존재한다. 명확한 진리와 사상을 찾는 고빈다에게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 그건 단순히 말로써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행하는 삶에 있다고 말하는 싯다르타의 모습은 모든 경험과 고통에서도 사랑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삶의 의미를 외부에서 찾고 있는가, 아니면 삶 그 자체를 사랑하고 있는가. 다른 누군가의 말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며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나 자신을 다시 바라보게 한 독서였다.

 

 

도빈

소설 싯다르타는 부처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그저 평범한 어느 구도자의 일생을 그린 이야기다. 싯다르타는 ‘본질적인 것이란 눈에 보이는 가식적 세계 나마 저편 피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고한 싯다르타 역시 윤회에 갇힌 인간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욕망과 욕구를 비워내기 위해 20년간 사랑과 돈, 권력에 둘러싸인채 지낸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일부러 택한 길일지라도 ‘사랑이란 순진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유치한 것’이라 생각하는 그 역시도 사랑과 속세의 달콤함은 그리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유혹적인 것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새장 속에 갇힌 새를 보며 문득 ‘이건 내가 원한게 아니었어!‘하며 별안간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구도자의 길을 걷는다. 운이 좋게도 강을 통해 진리에 다달은 뱃사공 바주데바 밑에서 수행하게 된다. 싯다르타는 과거와 미래는 없으며, 현재만이 존재할 뿐이다, 모든 존재의 단일성을 느끼고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봐야한다는 것을 배운다. 하지만 웃긴 것은 싯다르타에게는 그가 모르는 아들이 있었다. 창녀 카말라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카말라는 싯다르타가 자신을 소유하려하지 않고, 언제든 자기를 떠날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의 자식을 갖고 싶어했다고 생각한다. 우연하게 자신의 아들과 만나게 된 싯다르타는 진리에 거의 가까운 구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혈연과 자식이라는 가장 강력한 윤회에 사로잡히게 된다. ’너 역시도 모든 것을 겪고 깨달음을 얻었듯이 니가 아들의 윤회를 막을 수는 없다‘라는 바주데바의 부드럽지만 단호한 질타에 싯다르타는 그제서야 진정한 모든 욕망을 내려놓고 구도의 뜻을 마저 이룬다.

 

도대체 평범하고 순진한 사람들이 하는 ‘사랑’과 깨달은 자의, 모든 존재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단일성의 관점에서 행하는 ‘사랑’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사랑의 종류에 우열을 가릴 수가 있을까? 신의 눈에는 다 같아 보이지 않을까. 평생을 윤회 속에서 살아갈 평범한 나 같은 사람은 정말 모르겠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싯다르타와 같은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린 좀 더 평화로워질까? 자신을 알고, 비우기 위해 극단적으로 욕망을 끝까지 파고들고나서 깨달은 싯다르타처럼 우리 모두는 결국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만 아는 존재’가 숙명이라는 걸 헤세는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바로 윤회라는 것이고, 고통스럽거나 스스로가 역겹더라도 어쩔수가 없다. 빠져들고, 벗어나고, 다시 빠져드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니 즐겨라~”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헤세씨는. 물론 더 심오할테지. 그나저나 아는 것이 절반이라고 하던데, 윤회라는 굴레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좀처럼 달라지지가 않는 것은 왜일까.

 

 

고은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는 법이야.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으며, 지혜를 체험할 수 있으며, 지혜를 지니고 다닐 수도 있으며, 지혜로써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

 

이 책에서 가장 이해되고 공감된 문장이다. 배울 의지가 있다면 지식을 얻을 수 있고, 반대로 매달리고 간청해도 지혜는 얻기 힘들다. 내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대부분 그랬던 것 같다. 교과서의 내용을 머릿속에 넣고 암기하는 것만이 공부라고 생각했었다. 정해진 공간과 시간에서만 배움을 얻을 수 있다고 느꼈었다. 시간이 지나서 나를 둘러싼 배경과 교육이 바뀌면서 손바닥 근처만 머물던 시야가 끝이 보이지 않는 먼 곳을 바라보게 되었다. 어제와 같지만 다르게 보이는 풍경,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뀐 순간 느낀 전율을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다

 

모태신앙 출생인 나는 교회라는 공간은 하나의 놀이터 느낌이다. 일상처럼 스며들어간 자연스러운 곳이며, 만나는 사람들도 친척보다 더 가까운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신앙심이 전혀 없다는 사실만 빼면 완벽한 교회사람이다. 목사님의 말씀, 부모님의 기도, 수없이 많은 예배를 들어도 불확실성 믿음에 대한 불신만 커질 뿐이었다. 사실 천국보다 윤회사상을 더 좋아한다.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들어도 나는 그들이 말하는 '믿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싯다르타는 진리를 찾으면 편안해지는 걸까. 책을 읽는 내내 그저 궁금했다. 목표를 향해 집착하고, 모든 걸 가졌다가 모든 걸 버리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나서 부처가 된 싯다르타는 안식처를 찾아 만족한 걸까.

 

나에겐 '싯다르타의 강가'처럼 깨달음을 주는 장소는 없지만, 중요한 것들을 알려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내가 갈피를 못 받을 때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줬다. 내 생각과 기분을 정리하는 걸 덤덤히 도와줬다. 덕분에 초조함과 답답함에 휩싸였을 때도 편안히 숨 쉬는 법을 터득했다. 고통으로 가득한 악몽을 그저 기억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의 인생은 아직 시작이라 고난과 역경이 가득하지만, 나만의 안식처를 이미 가지고 있으니 잘 이겨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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