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까지 독서모임을 하면서 죽음이라는 단어와 친숙했던 것 같다. 바로 지난 모임에서 읽었던 <누구나의 일생> 역시 코로나와 죽음에 대한 여러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 책이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향의 책을 읽고 싶었다. 죽음의 반대의 키워드를 생각하다 보니 탄생과 창조라는 단어에 관심이 갔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몇 편의 영화를 보게 됐다. 우선 극장에서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를 보게 됐고 이 영화를 계기로 오랜만에 엑스맨 시리즈도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이 영화들은 공통적으로 한 개인의 탄생과 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평범했던 사람이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면서 히어로가 되기도 하고, 자신의 능력이나 외적인 모습 때문에 타인에게 괴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지만 어쨌든 새롭게 탄생한 존재, 그리고 자신의 능력이나 외적인 모습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히어로가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괴물이 되는 장면을 보면서 이번 독서모임에서는 역시 <프랑켄슈타인>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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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피부에 머리 양옆에는 나사가 박혀 있는 거대한 괴물. 너무 익숙한 모습이라 당연히 원작 속 괴물이 영화나 만화처럼 과장된 모습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그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 속 괴물은 분명 거대하고 흉측한 존재로 묘사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미지로 서술되어 있진 않다.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은 대학에서 생명의 비밀을 연구하게 된다. 죽음을 극복하고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겠다는 야망에 사로잡힌 그는 시체 조각들을 모아 거대한 인조 인간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막상 생명을 완성한 순간, 자신이 만든 결과물의 흉측한 모습에 경악한 그는 도망친다.
버려진 괴물은 홀로 숲속 오두막 근처에 숨어 지내며 한 가족을 관찰하면서 언어와 감정, 인간 사회를 독학으로 익히지만, 결국 사람들 앞에 나타났을 때 그의 외모 때문에 폭력적으로 거부당한다. 고독과 증오 속에서 괴물은 자신을 만들고 버린 프랑켄슈타인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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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조차 없는 이 괴물은 사유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말을 배우고, 스스로 세상을 살아가려고 한다. 사랑받고 싶어 하고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기도 한다. 단지 인간과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태어난 순간부터 저주받은 존재가 되고, 사람들에게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 된다는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더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은 프랑켄슈타인이었는데, 그는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겠다는 엄청난 야망을 가지고 몰두했지만 막상 자신이 만든 존재가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자 그 모습이 무섭다는 이유로 도망친다. 그리고 이후에도 자신이 만들어낸 괴물을 없애야 한다면서 생각만 할 뿐 사실 계속해서 두려워하고 피하기만 한다. 적어도 괴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설득해보려는 행동도 취해보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괴물과 비교하면 프랑켄슈타인은 너무 비겁하게 느껴진다.
괴물이 자신의 존재를 항변하는 대목이 있다. 그 부분을 읽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우리는 인간을 동정하고, 괴물은 혐오해야 하는가. 겁 많은 그저 지식만 앞선 프랑켄슈타인과, 저주받은 채 세상에 버려진 괴물 사이에 명확한 선이 그어질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과 그를 가르는 것은 무엇인가. 답은 명확하다. 그것은 오직 겉모습일 뿐이다. 괴물이 오두막집 가족 앞에 처음 나섰을 때, 그는 존재만으로 거부당한다. 유일하게 대화를 해본 상대는 앞이 보이지 않는 노인 뿐이다. 그의 사유도, 선의도, 언어도 그 순간에는 아무 힘이 되주지 못했다. 인간다움을 판별하는 기준이 그저 낯익음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줘야만 증명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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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동안 엑스맨 시리즈가 계속 생각났다. 특별한 능력은 히어로가 될 수 있는 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들과 다른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히어로라는 이름보다 뮤턴트, 비정상, 돌연변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게 붙는다. 나에게 엑스맨은 레이븐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찰스와 자신들을 박해하고 고통을 준 인간들을 어떻게 포용할 수 있느냐고 묻는 에릭 사이에서 레이븐은 계속해서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결국 레이븐은 찰스의 편도, 에릭의 편도 아닌 자신의 길을 선택한다. 누군가가 정해준 모습이나 역할이 아니라 레이븐으로 살아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이 이야기들이 계속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인간과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혐오받고, 자신의 존재 자체를 설명하고 증명해야 하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이븐에게는 적어도 찰스와 에릭이 있었고, 자신과 같은 존재들도 있었다. 자신의 모습 때문에 세상과 부딪히더라도 혼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마음에 남았던 것은 이 이름도 없는 괴물의 이후였다. 프랑켄슈타인마저 죽고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줄 이 하나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름도 없는 이 괴물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그 생각을 하니 너무 외로웠다. 아마 이 괴물은 또다시 숨어 살아가겠지만 그 생활이 그래도 조금은 자유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 없겠지만.
_정아
말로만 듣던 프랑켄슈타인 원문을 읽을 기회가 생겨서 기뻤다. 서문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나오는 짧은 문장에서부터 마음을 빼앗겼다. 덕분에 이후로도 비장하고 암울한 작중 분위기에 흠뻑 젖어서 완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소설을 읽으면서 얼마 전 본 영화 오디세이가 대번에 떠올랐다. 바로 이 구절 때문이다.
"저주받은 괴물! 여기 와서 네놈이 초래한 참담한 상황 앞에 신세한탄을 하는 건 좋다. 한데모여 있는 건물들에 횃불을 던지고, 폐허 속에 앉아 타들어가는 도시를 보며 붕괴를 슬퍼하는 셈이지. 위선적인 악마!"
이 말은 놀랍게도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죽은 뒤 괴물에게 향해진 비난이다. 괴물을 방치하고 무책임하여 화를 초래한 사람은 다름 아닌 프랑켄슈타인 박사인데 말이다. 자신의 침략으로 불바다가 된 트로이 한복판에 앉아 망연자실하는 오디세우스. 가해자인 오디세우스의 뒤늦은 후회도 위선이 아닌가.
괴물은 흉악한 외모 때문에 인간 사회에 어울리지 못하고 철저히 외면당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반듯한 가면이라도 만들어줬다면 그의 삶이 그토록 괴롭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내내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조차도 일종의 외모지상주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의 작가가 여성이라는 점에 한번 놀랐고, 마지막 부분 괴물의 진솔한 독백을 보며 작가가 모든 것을 계산하고 캐릭터를 만든 것 같다는 느낌에 두번 놀랐다. 프랑켄슈타인을 인생 책으로 꼽는 사람들이 있던데 그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_고은
요즘 쉽게 눈물이 나오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2번 울었다. 막냇동생 월리엄의 죽음을 전하는 아버지의 편지와 감옥에서 절망에 빠진 엘리자베트와 유스틴의 대화 장면에서였다. 애정 깊은 인물들의 대사와 표현은 눈물샘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책을 읽을수록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프랑켄슈타인 가족들과 2장 오두막 가족들의 모습은 참 보기 좋고 따뜻했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도 생겼다. 왜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서 창조한 생명체를 악마 취급하는가.
대중매체에 흔히 알려진 프랑켄슈타인(괴물)의 모습은 원작과 다르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 소설이 묘사하는 모습으로 잘 그려지지 않았다. 흉측하게 생긴 외모라면 얼굴을 바꾸면 되지 않는가. 18세기에 성형은 힘든 기술이겠지만 시도해 봐도 좋을 텐데 계속 생각이 들었다. 외모만의 문제로 박해받기엔 괴물은 너무나 현명하고 똑똑하고 인간다운 성품을 가졌다. 괴물과 프랑켄슈타인의 대립은 불쌍한 창조물과 책임을 회피하는 박사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실제 살인은 괴물이 저질렸지만, 자신이 만든 창조물을 돌보지 않고 폭주를 막을 기회를 걷어차고 예견된 살인마저 잘 넘어갈 거라고 회피하는 오만함이 프랑켄슈타인을 망친 거라고 느꼈다.
지금까지 독서모임을 하면서 죽음이라는 단어와 친숙했던 것 같다. 바로 지난 모임에서 읽었던 <누구나의 일생> 역시 코로나와 죽음에 대한 여러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 책이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향의 책을 읽고 싶었다. 죽음의 반대의 키워드를 생각하다 보니 탄생과 창조라는 단어에 관심이 갔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몇 편의 영화를 보게 됐다. 우선 극장에서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를 보게 됐고 이 영화를 계기로 오랜만에 엑스맨 시리즈도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이 영화들은 공통적으로 한 개인의 탄생과 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평범했던 사람이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면서 히어로가 되기도 하고, 자신의 능력이나 외적인 모습 때문에 타인에게 괴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지만 어쨌든 새롭게 탄생한 존재, 그리고 자신의 능력이나 외적인 모습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히어로가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괴물이 되는 장면을 보면서 이번 독서모임에서는 역시 <프랑켄슈타인>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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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피부에 머리 양옆에는 나사가 박혀 있는 거대한 괴물. 너무 익숙한 모습이라 당연히 원작 속 괴물이 영화나 만화처럼 과장된 모습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그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 속 괴물은 분명 거대하고 흉측한 존재로 묘사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미지로 서술되어 있진 않다.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은 대학에서 생명의 비밀을 연구하게 된다. 죽음을 극복하고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겠다는 야망에 사로잡힌 그는 시체 조각들을 모아 거대한 인조 인간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막상 생명을 완성한 순간, 자신이 만든 결과물의 흉측한 모습에 경악한 그는 도망친다.
버려진 괴물은 홀로 숲속 오두막 근처에 숨어 지내며 한 가족을 관찰하면서 언어와 감정, 인간 사회를 독학으로 익히지만, 결국 사람들 앞에 나타났을 때 그의 외모 때문에 폭력적으로 거부당한다. 고독과 증오 속에서 괴물은 자신을 만들고 버린 프랑켄슈타인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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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조차 없는 이 괴물은 사유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말을 배우고, 스스로 세상을 살아가려고 한다. 사랑받고 싶어 하고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기도 한다. 단지 인간과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태어난 순간부터 저주받은 존재가 되고, 사람들에게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 된다는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더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은 프랑켄슈타인이었는데, 그는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겠다는 엄청난 야망을 가지고 몰두했지만 막상 자신이 만든 존재가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자 그 모습이 무섭다는 이유로 도망친다. 그리고 이후에도 자신이 만들어낸 괴물을 없애야 한다면서 생각만 할 뿐 사실 계속해서 두려워하고 피하기만 한다. 적어도 괴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설득해보려는 행동도 취해보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괴물과 비교하면 프랑켄슈타인은 너무 비겁하게 느껴진다.
괴물이 자신의 존재를 항변하는 대목이 있다. 그 부분을 읽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우리는 인간을 동정하고, 괴물은 혐오해야 하는가. 겁 많은 그저 지식만 앞선 프랑켄슈타인과, 저주받은 채 세상에 버려진 괴물 사이에 명확한 선이 그어질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과 그를 가르는 것은 무엇인가. 답은 명확하다. 그것은 오직 겉모습일 뿐이다. 괴물이 오두막집 가족 앞에 처음 나섰을 때, 그는 존재만으로 거부당한다. 유일하게 대화를 해본 상대는 앞이 보이지 않는 노인 뿐이다. 그의 사유도, 선의도, 언어도 그 순간에는 아무 힘이 되주지 못했다. 인간다움을 판별하는 기준이 그저 낯익음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줘야만 증명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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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동안 엑스맨 시리즈가 계속 생각났다. 특별한 능력은 히어로가 될 수 있는 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들과 다른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히어로라는 이름보다 뮤턴트, 비정상, 돌연변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게 붙는다. 나에게 엑스맨은 레이븐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찰스와 자신들을 박해하고 고통을 준 인간들을 어떻게 포용할 수 있느냐고 묻는 에릭 사이에서 레이븐은 계속해서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결국 레이븐은 찰스의 편도, 에릭의 편도 아닌 자신의 길을 선택한다. 누군가가 정해준 모습이나 역할이 아니라 레이븐으로 살아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이 이야기들이 계속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인간과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혐오받고, 자신의 존재 자체를 설명하고 증명해야 하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이븐에게는 적어도 찰스와 에릭이 있었고, 자신과 같은 존재들도 있었다. 자신의 모습 때문에 세상과 부딪히더라도 혼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마음에 남았던 것은 이 이름도 없는 괴물의 이후였다. 프랑켄슈타인마저 죽고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줄 이 하나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름도 없는 이 괴물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그 생각을 하니 너무 외로웠다. 아마 이 괴물은 또다시 숨어 살아가겠지만 그 생활이 그래도 조금은 자유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 없겠지만.
_정아
말로만 듣던 프랑켄슈타인 원문을 읽을 기회가 생겨서 기뻤다. 서문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나오는 짧은 문장에서부터 마음을 빼앗겼다. 덕분에 이후로도 비장하고 암울한 작중 분위기에 흠뻑 젖어서 완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소설을 읽으면서 얼마 전 본 영화 오디세이가 대번에 떠올랐다. 바로 이 구절 때문이다.
"저주받은 괴물! 여기 와서 네놈이 초래한 참담한 상황 앞에 신세한탄을 하는 건 좋다. 한데모여 있는 건물들에 횃불을 던지고, 폐허 속에 앉아 타들어가는 도시를 보며 붕괴를 슬퍼하는 셈이지. 위선적인 악마!"
이 말은 놀랍게도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죽은 뒤 괴물에게 향해진 비난이다. 괴물을 방치하고 무책임하여 화를 초래한 사람은 다름 아닌 프랑켄슈타인 박사인데 말이다. 자신의 침략으로 불바다가 된 트로이 한복판에 앉아 망연자실하는 오디세우스. 가해자인 오디세우스의 뒤늦은 후회도 위선이 아닌가.
괴물은 흉악한 외모 때문에 인간 사회에 어울리지 못하고 철저히 외면당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반듯한 가면이라도 만들어줬다면 그의 삶이 그토록 괴롭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내내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조차도 일종의 외모지상주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의 작가가 여성이라는 점에 한번 놀랐고, 마지막 부분 괴물의 진솔한 독백을 보며 작가가 모든 것을 계산하고 캐릭터를 만든 것 같다는 느낌에 두번 놀랐다. 프랑켄슈타인을 인생 책으로 꼽는 사람들이 있던데 그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_고은
요즘 쉽게 눈물이 나오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2번 울었다. 막냇동생 월리엄의 죽음을 전하는 아버지의 편지와 감옥에서 절망에 빠진 엘리자베트와 유스틴의 대화 장면에서였다. 애정 깊은 인물들의 대사와 표현은 눈물샘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책을 읽을수록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프랑켄슈타인 가족들과 2장 오두막 가족들의 모습은 참 보기 좋고 따뜻했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도 생겼다. 왜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서 창조한 생명체를 악마 취급하는가.
대중매체에 흔히 알려진 프랑켄슈타인(괴물)의 모습은 원작과 다르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 소설이 묘사하는 모습으로 잘 그려지지 않았다. 흉측하게 생긴 외모라면 얼굴을 바꾸면 되지 않는가. 18세기에 성형은 힘든 기술이겠지만 시도해 봐도 좋을 텐데 계속 생각이 들었다. 외모만의 문제로 박해받기엔 괴물은 너무나 현명하고 똑똑하고 인간다운 성품을 가졌다. 괴물과 프랑켄슈타인의 대립은 불쌍한 창조물과 책임을 회피하는 박사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실제 살인은 괴물이 저질렸지만, 자신이 만든 창조물을 돌보지 않고 폭주를 막을 기회를 걷어차고 예견된 살인마저 잘 넘어갈 거라고 회피하는 오만함이 프랑켄슈타인을 망친 거라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