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 NOTE 옷장지기 생각노트


절망 타고 넘어가기

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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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어를 전공했다.

학과 활동도 열심히 했고 전공 공부에도 욕심이 커서 교내에서 자격증 시험을 보면 항상 한 손가락에 뽑힐 정도였다.

당연히 교내 교환학생 모집에 응모를 했고 1지망의 학교는 아니었지만 합격을 했다.

뛰듯이 기뻐할 틈도 없이 나는 잊고 있었던 나의 현실을 깨달았다.

당시 우리 집의 재정상황은 거의 최악을 치닫고 있었고,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합격 소식을 전한 내게 엄마는 미안하다고만 대답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일괄 지불 비용이 1천만원이 넘었다.

온갖 장학 제도를 알아보았지만 그건 교환학생 시작 후에 신청 가능한 제도들이었다.

항공비, 한 학기 등록금, 기숙사비를 일괄 지불로 턱턱 내 줄 친인척이나, 조금이라도 도와주겠다는 [폭삭 속았수다] 양금명의 교수님 같은 사람은 내겐 없었다.

(금명이의 힘든 유학 시절 에피소드를 보며 난 부럽기만 했다.)

결국 힘이 다 빠진 무릎을 세우고 담당 교수님을 방문해 눈물 콧물을 다 쏟아 가면서 취소 의사를 밝혔다.

며칠 후 학교 홈페이지 공지사항에 내 이름이 빠지고 다른 학생이 가게 되었다는 정정 글을 보고 또 한 번 눈물을 쏟았다.

학생회 간부였기 때문에 학과 활동에 빠질 수는 없고 나를 제외한 거의 모든 학생회 친구들이 교환학생 확정이 난 상태라 서로 마주치면 어색하게 딴 얘기만 했더랬다.

남의 시선이 중요한 20대 초반 시절, 새 학기가 되고 선후배들과 남은 친구들이 내 눈치를 보며 교환학생 얘기는 끝까지 안 하려고 의식하는 모습을 보고 미안하고 또 고역이었다.


몇 달은 웃지도 않고 수다스러운 내가 정말 조용히 살았던 것 같다.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기만을 바라는 것 처럼 뭘 바라지도 않고 부모님에게 화를 내거나 원망할 힘 조차 없이 지냈다.

그러다 두 친구가 보내준 메일을 읽었다.

둘은 서로 친하진 않고 나랑만 친한 사이인데 거의 일주일 사이에 둘이 내게 메일을 보낸 건, 내가 얼마나 힘들어 보였길래.. 라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둘 다 말은 못 걸고 메일로 보내준 내용은 각자의 힘든 시절 이야기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그들만의 이야기를 내게 말해주며 본인들도 그런 시절을 겪었지만 지금 잘 지내고 있으니 너도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둘의 이야기를 읽으며 정말 많이 울었고 정신을 조금 차리게 되었다.

(이 둘은 지금도 거의 매일 연락하며 지낸다.)


교환학생이 안 된다면 돈이 최대한 안 드는 선에서 일본에서 지낼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며칠 간 검색을 하다가 국제워크캠프 라는 곳을 발견하게 되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 해외에 거주하면서 봉사활동을 하는 곳이었는데 왕복항공비와 참가비 정도만 드는 시스템이었다.

일본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을 보다 ‘이거다!’ 싶은 게 있었다.

어린이캠프 봉사활동이었다.

당시 나는 어린이를 싫어했다. (!?)

징징거리고 말도 안 듣고 여하튼 모든 부정적인 단어를 어린이와 결부지었다.

그런 내가 왜 어린이들과 함께 하는 두 달을 선택했냐… 하면 기세였던 것 같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큰 시련에 마음이 꺾여 돌파구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래서 더더욱 ‘내가 싫어하는 것’에 뛰어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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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로 유명한 나가노라는 지역의 시골에 있는 곳이 본부였다.

더운 한여름에 색조 화장까지 한 한국의 대학생이 고속버스를 타고 시골의 터미널에 내려서, 또 전철을 타고 한 시간 동안 이동해야 하는 곳이었다.

심지어 전철은 자동문도 아니고 손으로 열어야 하고, 강 위의 철로를 건너면서 점점 산으로, 산으로 들어갔다.


df5a5a4aea729.jpg[손으로 열어주세요] 라고 쓰여있다.


수십 번 머릿속으로 되뇌였던 도착역은 ‘여기 맞아…?’ 라는 불안감을 크게 만들었다.

역사무소도 없고 개찰구도 없고 차도도 없고 사람도 없었다.

땡볕이어서 다행이지 해가 진 후였다면 울었을지도 모른다.

설상가상 산 속이라고 휴대폰 전파도 터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저 멀리서 파란 트럭이 다가 왔다.

영화 토토로의 메이네 가족이 처음 이사올 때 탄, 뒤에 짐칸이 있는 트럭에서 큰 눈에 까맣게 탄 여성분이 내리며 인사를 해주었다.


그 곳의 구조는 이렇다.

한 건물에서 직원분들이 근무를 하고 다른 건물은 시골유학을 하는 초,중학생들의 거주지였다.

나는 또 다른 건물에서 짐을 풀었고 유학하는 학생들과 같은 곳에서 식사를 하면 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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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낸 건물 다락방에서 본 마당. 길거리에 가로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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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여름이지만 산이라 습도가 높지 않아 빨래가 6시간이면 바삭바삭 잘 말랐다.]




며칠 후 본격적인 캠프가 시작되었다.

동경 혹은 나고야에 거주하는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산적캠프’ 라는 프로그램을 열었고, 아이들은 커다란 고속버스에 타고 와 자원봉사하는 일본인 대학생들을 리더로 세워 조를 꾸려 2박3일 혹은 3박 4일 동안 야영지에서 불을 피우고 스스로 삼시세끼를 해먹고 자연을 온 몸으로 느끼고 가는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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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가들도 이젠 술 마시는 어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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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고 나와서 자던 아이들도 있었다. 뒷 산에 멧돼지랑 원숭이 산대 얘두라ㅠㅠ]



물론 전자기기는 금지였고 덥고 아이들은 떠들고 처음 만난 사람들과 처음 하는 일들 속에서 긴장하느라 내가 아이들을 달가워하지 않고, 내가 교환학생을 못 가서 대체하려고 여기에 온 거고 몇 달 전 우울한 날들을 지냈다는 현실은 까맣게 잊게 되었다.

그저 당장의 프로그램 진행이 우선이었고, 피곤한 내 한 몸 빨리 씻고 자는 게 차선이었다.

그렇게 며칠 간 한 캠프를 진행하고 오전 시간을 청소하느라 시간을 보내고 나면, 오후에 다음 캠프 참가자 친구들의 찾아왔고 그렇게 몇 개의 캠프를 보내고 본부에 다시 돌아와서 깨끗한 지하수로 빨래를 하고 침낭이 아닌 요를 깔고 잠을 잘 수 있었다.

다음 캠프가 시작되기 전의 하루 이틀은 로밍비가 비싸다는 핑계로 엄마와 문자로 안부를 주고 받는 게 고작이었다.

그 동안 나는 유학하는 아이들과 지내거나 혼자 산너머를 바라보며 명상을 하는 시간을 보냈다.

생각이 너무 많고 버거워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던 몇 달 전의 나와 지금의 나의 괴리감에 헛웃음을 지으며 매일 노을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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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를 비울 수 있게 도와준 풍경. 벌레를 쫓으며 해가 질 때까지 멍 때리고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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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 있던 자리 옆엔 전에 키웠다는 강아지 코로의 무덤이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묻어주었다고..]







다시 캠프가 시작되고 피로가 누적된 나와 직원들은 폭주하기 시작했고, 속된 말로 뇌를 빼놓고 웃고 즐기게 되었다.

나이만 먹었지 하는 짓들은 더 애 같았다. 

(더 한 사진들이 많은데 내 사회적 체면을 생각해본다.)


a7c7751e1ede9.jpg[일단 웃기게 그려주세요 줴패니즈 섬샘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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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봐도 다들 제정신들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운영 직원이다.]





이런 행동들은 본부로 돌아가 오히려 직원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매년 꼭 한 두 명씩은 밤중에 엄마 아빠가 보고싶다며 울기 시작했고, 그게 전염돼서 다같이 오열을 하거나 너무 심하면 결국 본부로 데려가 부모님께 데려다 주거나 부모님이 그 시골까지 차로 데리러 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너와 직원들이 살신성인의 마음으로 잘 놀아줘서 아이들이 웃다 지쳐 잠들어 향수병이 오는 친구가 없어서 무사히 지나간 건 처음이라고 했다.

실은 살신성인 아니고 그냥 내가 즐긴건데… 라는 속마음은 묻어두었다.



db6f9091b6cd2.jpg[아이들이 발라준 천연 머드팩! 얘들아 근데 나 나름 섬샘님...]


d97db754232fd.jpg[누가 봐도 정말 즐기고 있는 사람. 심약자를 위해 크기를 줄였다. 

아이들은 좋아했다 ! 웃으면서 뛰쳐 도망가긴 했지만...] 



캠프를 지내고, 본부로 돌아와 자연을 보고, 명상을 하거나 수다를 떨고 그런 과정에서 오히려 내가 치유되었다.

마지막이 다가온다는 게 슬퍼 개강 일주일 후까지 있어도 되냐고 허락을 받아 비행기표도 변경하였다.

출국 전에 사용한 화장품의 톤들은 하나도 안 맞게 되도록 피부가 탔고, 벌레에게 물려 다리가 벌집이 되어 1년은 긴 바지만 입고 다녔지만 마음만은 확실히 가벼워졌다.

너무 깊이 생각하다 나를 몰아세우는 습관을 덜어내게 된 인생의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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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하루 전 짐을 꾸리며 찍은 다리의 상태. 더워서 짧은 바지로 생활했더니 허벅지까지 다 이런 상태였다.]


217a10fa82c7f.jpg[떠나는 날 아침의 식사는 제일 큰 형아 둘이서 만들어준 식탁이었다. 맨날 틱틱거리던 애들이... 몰래 눈물 찔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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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망이 왔을 때 바로 극복하지 못하고 피하지도 못하고 신나게 탔다. 마치 파도인양.

하지만 그건 못 넘을 파도는 아니더라.

넘어서도 또 다른 파도가 올 것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난 아직도 그 사실을 알면서 바다 위에 있다.

다시 큰 파도가 올 수도 있고 죽을 때까지 서해마냥 잔잔한 바다일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싫어했던 어린이를 기세로 부딪혀보자!',  '교환학생을 못 간다면 다른 경로로라도 가보자!' 라고 생각했던 그 때의 마음으로, 계속 바다에서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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