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받은 돌봄과 어머니의 연금수령액
어린 시절 나는 어느 날 어머니께 이렇게 질문했다. “엄마는 왜 나가서 일 안 해?” 어떤 순수악을 가진채 던진 질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엄마는 니가 그런 질문을 했었노라고 기분 나쁜 내색없이 웃으며 말해주셨다. 그 뒤로 어머니가 ‘바깥일’을 하기 시작하시며 초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안된 나는 오빠손을 잡고 등교 했다. 어머니는 내게 늘 “몇번째로 등교했어~? 학교가니까 친구 있었어?”라고 묻곤하셨다. 그녀는 훗날 그 질문은 본인의 출근시간에 맞춰 어린 내가 너무 일찍 등교하는 바람에 교실에 혼자 있을 나를 상상하니 마음이 아팠기에 던진 질문이었노라고 말씀해주셨다. 나는 더 이상 그 날의 내가 텅 빈 교실을 어떤 기분과 표정으로 들어갔는지, 두 번째 세 번째로 오는 친구들을 어떤 책임감으로 반겼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떻게 ‘그런 것까지’ 마음 아파할 수 있냐며 놀라는 일과, 분명 그 때의 나는 전혀 두려워하지도 유별나게 생각하지도 않았을거라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바깥일’ 만큼이나 헌신적이고 수많은 몸과 마음의 노동력을 요구했던 약 10여년의 전업주부로서의 삶은 그녀의 노후 국민연금액을 줄이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요즘은 국민연금 출산 크레딧 제도로 육아로 인한 연금납부 기간을 1년간 인정받을 수 있다. 많은 보완점이 필요하지만.) 물론 지난 과거는 그녀의 선택이었고 그녀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의 순수한 희생이 미래의 노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세상은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부모의 노후생활을 금전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돌보기가 어렵다. 그들은 내가 태어나고 자라는 걸 지켜보았으나, 나는 그들의 늙음을 바라볼수가 없다. 내가 바라는대로 흘러가는 나의 일상은 부모님의 ‘건강’을 전제로 이뤄진다. 한 분이 건강을 잃는다면, 나 또한 나의 일상을 잃게 된다. 물론 책임져보지 않았으면서 지레 겁을 먹는 꼴이다. 두려움에 기인한 이기적인 마음이 맞다고 고백한다. 우리 가족은 서로의 안녕을 물으며 본인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 일상에 감사함을 매일 나눈다.
#나의 이웃들의 돌봄은 안녕할까
고등학생 시절 봉사 동아리를 했다. 내가 살았던 지역은 한 시간을 달려도 여전히 ‘도시’인 서울과 달리, 논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선배 두 명과, 동급생 세 명이었나. 우린 버스를 타고 꽤나 긴 시간을 달려 장애인복지시절에 도착했다. 그 곳엔 나의 또래로 보이는 친구들이 있었다. 하루종일 그 곳 친구들을 씻기고, 밥을 같이 먹고, 어떠한 활동을 했다. 한 여학생 친구를 씻기고, 옷을 입힌 다음 휠체어로 옮기는 중이였다. 기댈거라곤 나의 두 팔 밖에 없는 그 친구는 전적으로 본인의 몸을 맡기고 있었다. 난 그 친구를 옮기다 팔이었나, 다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 친구의 신체는 휠체어에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바람에 꿍 소리가 났다. 연신 미안하다며 몸둘바를 모르는 나에게 그 친구는 “언니 나 괜찮아”라고 하였다. 그 친구는 떠나는 순간에 “언니 또 올 거지?”라고 물었고, 나는 그 약속를 지키지 못했다. 그 뒤로 나의 시간은 가보지도 못한 독도지킴이 활동하는 고등학생으로, 수능에 지친 수험생으로 가득 찼으며 그 친구가 나의 일상에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었다.
그 후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몇번의 이사와 해외여행도 하고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는 동안 나의 곁은 몸과 마음에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이 있다는 사실과 가깝지 않았다. 난 가고 싶은 곳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었으며, 하고 싶은 일은 사회적 제약과 시선이 발목잡지 않았다. 그저 시간과 돈만 내면 되는 것이었다. 저출산과 고령화, 저성장 시대 그리고 서서히 나도 노후를 생각하면서 ’돌봄‘을 되돌아 보게 되었다. 평화시장의 딸들이 동생들을 위해 밤새도록 일하고 집에 갈 때도 버스비를 아끼려고 걸어갔다는 얘기를 전태일을 통해 읽었다. 70년대 그 곳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는 사회에 대해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말하는 하나의 불꽃이 되어서야 세상은 그의 존재를 알았다. 누군가는 주변 이들의 삶을 돌보며 본인을 희생하기도 하고, 나 같은 범인(凡人)은 세상이 변하니까, 나의 필요가 생기니까 그제서야 ‘돌봄이 돌보는 세계’가 있었지하며 책을 뒤적거린다. 정말 부끄럽다.
샹바오. 내가 좋아하는 중국 학자이다. 그가 말했다. “저는 젊은 친구들이 그들의 사고와 탐색을 도울 만한 어떤 도구를 갈망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 예전에는 도구를 사용해서 분석하고 경제 운용 방법을 설계하고, 사회 자원을 재분배하고, 도시계획을 하는 정도로 충분했습니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중의 사고를 돕는 도구입니다.한 대의 컴퓨터, 스마트폰처럼 제가 상대방에게 건네줄 수 있는 물건 같은 것이 아닙니다. 대신 그들의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주변의 상실, 샹바오 지음 / 글 항아리)
내가 나를 부끄러워 한다는 것도 알겠고, 세상이 어떠한 도움과 변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도 알겠다. 그럼 내가 해야하는 것은 계속 이렇게 혼자서 얼굴을 붉히는 일밖에 없던가? 나는 사회의 돌봄체계가 궁금하고, 세상에 어떤 이들이 존재하며, 어떤 일상을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독서 모임원들에게 “돌봄이 돌보는 세계”를 같이 읽자고 제안했다.

#꿈틀거리는 세상 맛보기
가파른 시대의 변화는 다행히도 또다른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낸다. 절망만 있지 않다는게 인간 세상의 묘미인것 같다. 첫째, 고령화 사회로 인한 요양보호사 수요 증가는 요양보호사 노동 권리 신장과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의 필요성이 요구되고 있다. 25년 7월 1일 요양보호사들이 직접 참여해 ‘요양보호사 윤리강령’을 선포한 일은 어떤 마음 속 울림을 준다.관련기사아래첨부 간호사에게 나이팅게일 선서가 있고, 의사에겐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있는 것과 같다. 요양보호사로서의 자긍심을 스스로 새기고, 공공 요양기관 확충 등 사회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실천해야할 일을 제안한다. 둘째, 저성장과 친환경 시장은 다양한 돌봄 직업 탄생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농업 코디네이터, 환경 교육강사, 탄소중립 시민활동가 등이 그 예다. 단순히 산불 조심 포스터를 주구장창 그린 나의 세대와 현재 어린이들의 환경지식은 다를 것이라 기대한다. 셋째, 지역소멸에 반하여 ‘로컬’ 돌봄 영역에서의 새로운 교육 사업 등장, 노동 인력 확보 및 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춘천 별빛 사회적협동조합 사례로 보는 ‘농촌유학 프로그램’이 그 예다. 지역의 자연환경, 문화, 역사적 특성을 살린 농촌유학 교육이다. 나에게는 ‘시골 할머니집’이 있어 자연 속에 마음껏 뛰어놀며 자랐으나, 그렇지 않은 대도시 아이들에게 좋은 정서적, 신체적 함양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또한 열린옷장에서도 하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한 유니버셜 의류확보나, 휠체어도 이용할 수 있는 ‘누구나 탈의실’ 2개, 다양한 체형을 위한 빅사이즈 의류에 대한 제작 노력 역시 정장대여업체로서 전문성을 높이고 이용자층 선택권을 넓히는 흐름 중 하나이다.
중국학자 샹바오가 말한 도구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 나는 이렇게 하나둘씩 사례를 수집하고 찬찬히 살펴본다. 한국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는 어떤 복지 정책이 있는지, 유럽이나 독일, 일본, 대만은 어떻게 하는지 자꾸만 비교해보려고 노력한다. 로컬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는지 관심있게 지켜보고, 가보려고 메모한다. 나는 분명 엄청난 돌봄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으나 ‘도대체 돌봄이 무엇인지’ 알고자 길을 빙 돌아가며 알아보고자 노력한다. 어리석어도 어쩔 수 없다. 하나씩 알다보면 당장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돌봄’이 있을 거라 확신한다.
결국 돌봄을 자꾸만 말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돌봄은 좋은 것이고, 인간은 누구나 돌봄이 필요하니까’라는 이상적인 이유에 있지 않다. 고민하여 말하자면 ‘저성장·저출생·고령화에 따른 사회적 재생산 체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필요성과 지역소멸·메가시티화에 따른 연대 또는 지역 커뮤니티 감소로 인한 소외되는 시민의 증가’가 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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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보호사 윤리강령' 공식 선포…권익 향상 박차
🙌독서모임원 후기
| 가연 | 책을 읽으며 계속 생각한 것은 돌봄을 받는 사람들, 그리고 돌봄을 행하는 사람들의 존재에 대한 문제였다. 우리는 이들의 존재를 제도나 정책 속에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사회 속에서 온전히 존재로 인정받는 것이야말로 돌봄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의 존재가 보이지 않거나 언급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돌봄 자체가 실현되기 어렵다.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탈시설’과 ‘탈성장’이라는 키워드는 결국 이러한 존재의 인정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느꼈다. 시설 중심의 돌봄이 아닌 지역사회에서의 삶, 관계 중심의 사회로의 전환은 돌봄의 주체들이 사회 속에서 존중받고 자리를 가질 때 가능해진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돌봄’이라는 것이 적절한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제도와 정책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돌봄의 실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돌봄은 행정적 절차나 복지의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고 함께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태도와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느꼈다. |
| 정아 | 돌봄이 필요한 사람은 어린이나 노인, 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으나 사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돌봄을 받고 돌봄을 한다. 그런데 왜 돌봄노동에 대한 평가는 이리도 박한가.
요즘 사람들은 눈이 너무 높아진 것 같다. 잘사는 삶의 기준이 물질적인 것에 치우치고 그 수준은 높아만 져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쉽게 패배감을 느끼고 불운하다 여기고 슬퍼한다. 주변인과 비교하여 더 우월해야 채워지는 성취감은 모두를 경쟁자이자 평가 대상으로 여기게 해 결국 자신의 안위만이 중요해진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타적인 돌봄은 박하게 평가될 수밖에. 자기만 끌어안고 불행해하는 잘난 외톨이들.
그래서 욕망을 향해 내달리는 인간을 자제 시켜 줄 사회 시스템이 중요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환경이 정말 중요하다. 누구나 중요하게 여기는 선의와 정의는 형태가 없으면 홀연히 사라지고 만다. 그것을 붙잡아 시스템으로 정착시켜야 인간 사회는 선해지고 서로 돌봄을 행할 여력도 생긴다.
다만 사회 시스템 대부분이 건강한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정해지면서 소외되는 사람이 더 늘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사회의 존재 목적은 걸러냄이 아니라 어우러짐에 있다. 기준에 대한 편견과 한계를 깨고 모두를 위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
| 고은 | 중학생 때 청각장애를 위한 대사 자막과 해설 설명이 나오는 영화를 관람한 적이 있다. 당시 한국영화를 자막으로 관람한 건 처음이라 그저 신기했고, 영화 내용을 놓침 없이 이해할 수 있어 놀랍고 감동했다. 왜 이렇게 편한 시스템을 일반 영화관에서는 도입을 안하는 걸까 생각도 들었다. 나는 주변보다 듣고 이해하기까지 한 템포 늦을 때가 많아서 친절하게 설명이 있으니 보기 참 편했다. 이 책을 읽고 돌봄이 일생적으로 스며들면 약자뿐만 이니라, 모든 이들이 이롭게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죽는 순간까지 누군가의 돌봄을 받으며 살아가는데, 정작 돌봄을 하찮게 여기는 사회는 모순적이다. 이 자본만을 바라보는 사회에서 돌봄의 중요성을 올리는 것은 한없이 어렵고 갈피를 못잡고 있다. 대상자가 정말 원하고 필요한 제도와 성적이 아닌 나와 타인을 돌보는 교육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전국 돌봄파업을 일으키고 싶다. |
#내가 받은 돌봄과 어머니의 연금수령액
어린 시절 나는 어느 날 어머니께 이렇게 질문했다. “엄마는 왜 나가서 일 안 해?” 어떤 순수악을 가진채 던진 질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엄마는 니가 그런 질문을 했었노라고 기분 나쁜 내색없이 웃으며 말해주셨다. 그 뒤로 어머니가 ‘바깥일’을 하기 시작하시며 초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안된 나는 오빠손을 잡고 등교 했다. 어머니는 내게 늘 “몇번째로 등교했어~? 학교가니까 친구 있었어?”라고 묻곤하셨다. 그녀는 훗날 그 질문은 본인의 출근시간에 맞춰 어린 내가 너무 일찍 등교하는 바람에 교실에 혼자 있을 나를 상상하니 마음이 아팠기에 던진 질문이었노라고 말씀해주셨다. 나는 더 이상 그 날의 내가 텅 빈 교실을 어떤 기분과 표정으로 들어갔는지, 두 번째 세 번째로 오는 친구들을 어떤 책임감으로 반겼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떻게 ‘그런 것까지’ 마음 아파할 수 있냐며 놀라는 일과, 분명 그 때의 나는 전혀 두려워하지도 유별나게 생각하지도 않았을거라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바깥일’ 만큼이나 헌신적이고 수많은 몸과 마음의 노동력을 요구했던 약 10여년의 전업주부로서의 삶은 그녀의 노후 국민연금액을 줄이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요즘은 국민연금 출산 크레딧 제도로 육아로 인한 연금납부 기간을 1년간 인정받을 수 있다. 많은 보완점이 필요하지만.) 물론 지난 과거는 그녀의 선택이었고 그녀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의 순수한 희생이 미래의 노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세상은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부모의 노후생활을 금전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돌보기가 어렵다. 그들은 내가 태어나고 자라는 걸 지켜보았으나, 나는 그들의 늙음을 바라볼수가 없다. 내가 바라는대로 흘러가는 나의 일상은 부모님의 ‘건강’을 전제로 이뤄진다. 한 분이 건강을 잃는다면, 나 또한 나의 일상을 잃게 된다. 물론 책임져보지 않았으면서 지레 겁을 먹는 꼴이다. 두려움에 기인한 이기적인 마음이 맞다고 고백한다. 우리 가족은 서로의 안녕을 물으며 본인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 일상에 감사함을 매일 나눈다.
#나의 이웃들의 돌봄은 안녕할까
고등학생 시절 봉사 동아리를 했다. 내가 살았던 지역은 한 시간을 달려도 여전히 ‘도시’인 서울과 달리, 논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선배 두 명과, 동급생 세 명이었나. 우린 버스를 타고 꽤나 긴 시간을 달려 장애인복지시절에 도착했다. 그 곳엔 나의 또래로 보이는 친구들이 있었다. 하루종일 그 곳 친구들을 씻기고, 밥을 같이 먹고, 어떠한 활동을 했다. 한 여학생 친구를 씻기고, 옷을 입힌 다음 휠체어로 옮기는 중이였다. 기댈거라곤 나의 두 팔 밖에 없는 그 친구는 전적으로 본인의 몸을 맡기고 있었다. 난 그 친구를 옮기다 팔이었나, 다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 친구의 신체는 휠체어에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바람에 꿍 소리가 났다. 연신 미안하다며 몸둘바를 모르는 나에게 그 친구는 “언니 나 괜찮아”라고 하였다. 그 친구는 떠나는 순간에 “언니 또 올 거지?”라고 물었고, 나는 그 약속를 지키지 못했다. 그 뒤로 나의 시간은 가보지도 못한 독도지킴이 활동하는 고등학생으로, 수능에 지친 수험생으로 가득 찼으며 그 친구가 나의 일상에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었다.
그 후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몇번의 이사와 해외여행도 하고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는 동안 나의 곁은 몸과 마음에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이 있다는 사실과 가깝지 않았다. 난 가고 싶은 곳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었으며, 하고 싶은 일은 사회적 제약과 시선이 발목잡지 않았다. 그저 시간과 돈만 내면 되는 것이었다. 저출산과 고령화, 저성장 시대 그리고 서서히 나도 노후를 생각하면서 ’돌봄‘을 되돌아 보게 되었다. 평화시장의 딸들이 동생들을 위해 밤새도록 일하고 집에 갈 때도 버스비를 아끼려고 걸어갔다는 얘기를 전태일을 통해 읽었다. 70년대 그 곳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는 사회에 대해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말하는 하나의 불꽃이 되어서야 세상은 그의 존재를 알았다. 누군가는 주변 이들의 삶을 돌보며 본인을 희생하기도 하고, 나 같은 범인(凡人)은 세상이 변하니까, 나의 필요가 생기니까 그제서야 ‘돌봄이 돌보는 세계’가 있었지하며 책을 뒤적거린다. 정말 부끄럽다.
샹바오. 내가 좋아하는 중국 학자이다. 그가 말했다. “저는 젊은 친구들이 그들의 사고와 탐색을 도울 만한 어떤 도구를 갈망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 예전에는 도구를 사용해서 분석하고 경제 운용 방법을 설계하고, 사회 자원을 재분배하고, 도시계획을 하는 정도로 충분했습니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중의 사고를 돕는 도구입니다.한 대의 컴퓨터, 스마트폰처럼 제가 상대방에게 건네줄 수 있는 물건 같은 것이 아닙니다. 대신 그들의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주변의 상실, 샹바오 지음 / 글 항아리)
내가 나를 부끄러워 한다는 것도 알겠고, 세상이 어떠한 도움과 변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도 알겠다. 그럼 내가 해야하는 것은 계속 이렇게 혼자서 얼굴을 붉히는 일밖에 없던가? 나는 사회의 돌봄체계가 궁금하고, 세상에 어떤 이들이 존재하며, 어떤 일상을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독서 모임원들에게 “돌봄이 돌보는 세계”를 같이 읽자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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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시대의 변화는 다행히도 또다른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낸다. 절망만 있지 않다는게 인간 세상의 묘미인것 같다. 첫째, 고령화 사회로 인한 요양보호사 수요 증가는 요양보호사 노동 권리 신장과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의 필요성이 요구되고 있다. 25년 7월 1일 요양보호사들이 직접 참여해 ‘요양보호사 윤리강령’을 선포한 일은 어떤 마음 속 울림을 준다.관련기사아래첨부 간호사에게 나이팅게일 선서가 있고, 의사에겐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있는 것과 같다. 요양보호사로서의 자긍심을 스스로 새기고, 공공 요양기관 확충 등 사회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실천해야할 일을 제안한다. 둘째, 저성장과 친환경 시장은 다양한 돌봄 직업 탄생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농업 코디네이터, 환경 교육강사, 탄소중립 시민활동가 등이 그 예다. 단순히 산불 조심 포스터를 주구장창 그린 나의 세대와 현재 어린이들의 환경지식은 다를 것이라 기대한다. 셋째, 지역소멸에 반하여 ‘로컬’ 돌봄 영역에서의 새로운 교육 사업 등장, 노동 인력 확보 및 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춘천 별빛 사회적협동조합 사례로 보는 ‘농촌유학 프로그램’이 그 예다. 지역의 자연환경, 문화, 역사적 특성을 살린 농촌유학 교육이다. 나에게는 ‘시골 할머니집’이 있어 자연 속에 마음껏 뛰어놀며 자랐으나, 그렇지 않은 대도시 아이들에게 좋은 정서적, 신체적 함양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또한 열린옷장에서도 하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한 유니버셜 의류확보나, 휠체어도 이용할 수 있는 ‘누구나 탈의실’ 2개, 다양한 체형을 위한 빅사이즈 의류에 대한 제작 노력 역시 정장대여업체로서 전문성을 높이고 이용자층 선택권을 넓히는 흐름 중 하나이다.
중국학자 샹바오가 말한 도구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 나는 이렇게 하나둘씩 사례를 수집하고 찬찬히 살펴본다. 한국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는 어떤 복지 정책이 있는지, 유럽이나 독일, 일본, 대만은 어떻게 하는지 자꾸만 비교해보려고 노력한다. 로컬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는지 관심있게 지켜보고, 가보려고 메모한다. 나는 분명 엄청난 돌봄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으나 ‘도대체 돌봄이 무엇인지’ 알고자 길을 빙 돌아가며 알아보고자 노력한다. 어리석어도 어쩔 수 없다. 하나씩 알다보면 당장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돌봄’이 있을 거라 확신한다.
결국 돌봄을 자꾸만 말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돌봄은 좋은 것이고, 인간은 누구나 돌봄이 필요하니까’라는 이상적인 이유에 있지 않다. 고민하여 말하자면 ‘저성장·저출생·고령화에 따른 사회적 재생산 체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필요성과 지역소멸·메가시티화에 따른 연대 또는 지역 커뮤니티 감소로 인한 소외되는 시민의 증가’가 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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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눈이 너무 높아진 것 같다. 잘사는 삶의 기준이 물질적인 것에 치우치고 그 수준은 높아만 져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쉽게 패배감을 느끼고 불운하다 여기고 슬퍼한다. 주변인과 비교하여 더 우월해야 채워지는 성취감은 모두를 경쟁자이자 평가 대상으로 여기게 해 결국 자신의 안위만이 중요해진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타적인 돌봄은 박하게 평가될 수밖에. 자기만 끌어안고 불행해하는 잘난 외톨이들.
그래서 욕망을 향해 내달리는 인간을 자제 시켜 줄 사회 시스템이 중요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환경이 정말 중요하다. 누구나 중요하게 여기는 선의와 정의는 형태가 없으면 홀연히 사라지고 만다. 그것을 붙잡아 시스템으로 정착시켜야 인간 사회는 선해지고 서로 돌봄을 행할 여력도 생긴다.
다만 사회 시스템 대부분이 건강한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정해지면서 소외되는 사람이 더 늘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사회의 존재 목적은 걸러냄이 아니라 어우러짐에 있다. 기준에 대한 편견과 한계를 깨고 모두를 위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죽는 순간까지 누군가의 돌봄을 받으며 살아가는데, 정작 돌봄을 하찮게 여기는 사회는 모순적이다. 이 자본만을 바라보는 사회에서 돌봄의 중요성을 올리는 것은 한없이 어렵고 갈피를 못잡고 있다. 대상자가 정말 원하고 필요한 제도와 성적이 아닌 나와 타인을 돌보는 교육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전국 돌봄파업을 일으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