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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옷장 독서클럽 _4회차 후기]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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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에 한 권씩 정하여 함께 읽고 얘기 나누는, 
열린옷장 독서클럽

2025년 1월의 책 📕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포레스트 카터> 

1/24 참여자 : 안도빈 / 이정아 / 고가연 / 박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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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을 보았을 때 

우리는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야하는가?"


고등학생 때 우연히 이 책을 읽고 책 속에 담긴 삶과 자연에 대한 태도는 나에게 많은 영감과 교훈을 주었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작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또 다른 인디언 소설 <제로니모>를 쓴 작가라는 것 외에는.


그런데 왠걸. 독서모임이 시작되자마자 한 명이 이 작가의 실체에 대해 종이에 친히 메모까지 한 내용을 신나게 읽으며 낱낱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나 외에도 중학생 때 이 소설을 읽으며 크게 감명을 받았던 동료와 나는 아연질색하였다. ‘뭐? 내가 존경하던 소설이 전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상을 가진 사람이 쓴 책이라고?’


저자에 대해서 요약하자면 이렇다. '평화주의, 인간의 따뜻한 영혼과 인디언들의 철학을 말하는 소설을 쓴 작가는 사실 1950년대 미국에서 인종분리주의자, 극단적 백인우월주의 KKK 정치 운동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저자에 대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여전히 어린이들의 필독서로 ‘작은 고전’으로서 아직도 평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첫 번째 감정은 부끄러움과 배신감이었다. 두 번째 감정은 의아함이었다. 작가는 이 사실을 해명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우리는 무슨 생각으로 인디언 출신 행세를 하며 평화주의/평등주의 소설을 썼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우리의 독서모임은 소설의 내용보다는 ‘현대인이 예술을 소비하는 자세’에 대해서 대화가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사생활은 사람들의 입에 오를내릴 정도로 명예롭지 못하거나, 지금은 소위 금기시되는 사상을 가졌던 사람들이 만든 창작물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만든 창작물을 영화, 노래, 컨텐츠, 책 심지어는 일상생활용품까지 모든 영역에서 발견할 수 있고, 우리는 여전히 끊임없이 소비한다.


  • 우리는 창작자들의 사생활에 대해서 얼마나 알권리가 있는가?
  • PC(정치적으로 옳은/politically correct)하지 못한 작가나 예술인들의 창작물에 대해서 행해지는 불매운동은 과연 지속성이 있는가?
  • 불매운동으로서 행해지는 보복적인 집단적 의견 표현은 과거에 비해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정보의 접근성이 커졌기 때문에 생길 수 있었고 그렇다면 ‘현대적’ 정치 활동이라고 볼 수 있는가? 아니면 단순히 개인의 취향 문제일 뿐인가.


 2025년 1월의 책으로써 서로의 삶의 가치관에 대해 가볍게 나눠봐야겠다는 나의 원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어느새 우린 17세기 유럽 살롱에서 만난 철학자들처럼,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철학적인 주제로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아, 이토록 심오한 독서모임이라니.




필자는 이 독서모임 후기를 작성하기 앞서, 이 질문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하여 두 권의 책을 추가로 읽고 있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지젤 사피로의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이다. (아직 다 못 읽고 이 글을 쓴다는 것을 고백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유명한 논제, 평범한 사람들의 ‘악의 평범성’에 대해 논하는 책이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 버튼을 누르는 업무를 맡은 사람은 악마인가? 아니면 그 또한 나치라는 사상 아래에서 또다른 피해자일 뿐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 나는 이 책을 ‘소비자이자 시민인 나라는 개인이 어떻게 집단/사회와 관계맺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읽고 있다.

지젤 사피로의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는 2020년에 쓰여진 책으로, 현대에 벌어지고 있는 창작자들의 윤리성 논란 이슈에 대해 어떻게 분석 및 해석을 해야하는지 사회적/철학적 논점을 제시해준다. (매우 강추) - 나는 이 책을 어떻게하면 좀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내가 가진 의문을 사고할 수 있는지 배움을 얻기 위해 읽고 있다.


지금 내가 질문들에 대해 내린 잠정적인 결론은 이렇다.



  • ‘우리’가 창작자들의 윤리에 대해 토론한다는 것은 창작자들의 위치와 우리를 동등하게 둘 수 있기 때문이다.
    - 만들어진 문화 자본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시대를 벗어나 우리는 창작물을 평가하고 취향에 맞춰 소비한다. 이는 창작자들 역시 ‘평범한’ 개인과 동일한 ‘윤리적 면죄부’를 가진다.
  • 창작물이란 이제 한 개인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이다.
    - 내가 속한 가족과 국가, 종교가 나를 설명하는 시대는 지났다. 내가 소비하는 영화, 노래, 패션, 책 등 모든 문화자본은 나를 설명해주기 때문에 취향에 대해서 ‘보이콧’을 말하는 건 나의 권리이다. 내가 저자 포레스트 카터에 대한 진실을 알고 '수치심과 부끄러움'의 감정을 느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 창작물에 대해 토론할 수 있다는 것은 집단적으로 행해지는 ‘객관화 작업’이다. 
    -친일파의 역사를 청산하는 것과 같은 맥락. 시대가 변하면서 사회가 진보할 수록 지난 창작물에 대한 비판적 사고는 더욱 다양해질 것으로 보인다.



"흠이 있는 사람이 만든 것은 모조리 없어져야해"라거나, "이상한 사람이 만든거라도 물건만 좋으면 상관없어"라는 극단적인 입장은 잠시 내려놓아보자. 우리가, 아니 더 작게 '나'라는 사람이 가져야할 자세는 '그래. 이런 걸 만들었구나. 이 사람은 어떤 생각과 행동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창작물에서는 이러한 생각을 담았네? 어떤 의도로 만들었을까? 우리에게 자신의 사상을 교묘하게 전달하려는 목적일까? 아니면 다른 다른 목적을 가지고 만든걸까?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걸까? 이 작가도 사회의 어떤 부분에 영향을 받고있는걸까?' 이 될테다. 한발짝 물러서서 작품을 한 번 더 '가지고 놀 줄 아는' 똑똑함을 가져보면 어떨까. 그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삭제하기엔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리는 것과 같다.



신기한 것은 프랑스는 작품/창작자의 도덕성에 대한 기준보다 ‘심미주의적’ 입장이 문화계 안에서는 좀 더 폭넓게 받아들여진다. 정치적 억압의 역사가 있는 독일에서는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요구가 있다. 이에 반해 도덕이 상징 자본을 구성하고, 다양한 인종의 권리 투쟁의 역사가 있는 미국은 창작물의 도덕적 판단에 대해 엄격하여 ‘캔슬 컬처’ 입장이 우세하다. *'작가와작품을분리할수있는가' - 지젤사피로 p.30 

약자나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세상은 변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시민들이 대중의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창작자들을 엄격한 도덕적 잣대로 ‘소비’라는 행위로 심판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판단의 기준은 사회적, 국가적으로 다른 양상을 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독서모임의 일원 ‘가연님’의 후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문화자본을 배포하는 기관(도서관/출판사/유명시상저널/비평가 등)은 좀 더 개인들이 객관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할 것이다. 정보의 대중성으로 인해 우리는 서서히 더 많은 것을 알게될 것이고, 선택의 자유는 커지고 있다.


단순히 책의 내용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것을 넘어 작품과 저자에 대한 평가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마주해야할 '상징'들에 대해서 가져야할 자세에 대해 같이 토론할 수 있어 참으로 기뻤다. 


-옷장지기 도빈 씀




🐧 모임원 후기 


이정아 평소라면 책을 먼저 읽었을 텐데 어쩌다 보니 작가 이력을 먼저 찾아보고 책을 읽게 되었다. 
이중적인 작가 면모를 알고 나니 낭만적으로 묘사한 산골 풍경과 침략자에게 문화와 터전을 빼앗겼지만 굴하지 않고 이어나가려는 의지를 보이는 원주민들에 대한 존경과 경외가 모두 거짓으로만 보였다. 작품을 먼저 알았던 사람들은 배신감이 클 것이다. 작가의 본 모습이 드러나기 전 책이 영화화되며 인기를 끈 탓에 지금까지도 이 책의 비밀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적어도 출판사나 인터넷 서점 작가 소개에는 해당 내용을 실어야 하는 거 아닌가?
박고은 나는 책을 좋아하면서도 추천도서, 베스트셀러, 유명한 책은 잘 읽지 않는다.
 온전히 내 느낌과 흥미 위주로 읽다 보니 흔히 '명작'이라는 책들을 잘 모른다. 이 책은 중학생 때 친구가 추천해서 읽었었다. 청소년 추천도서에 걸맞게 순수함과 따뜻한 감성이 가득한 내용에 눈물을 흘리며 깊에 빠져들었다. 중학시절 친구와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책을 이번에 독서모임에서 다시 읽게 되어 기뻤다. 거의 10년 만의 다시 읽었는데 여전히 눈물이 흘렀다.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주인공을 아끼고 사랑하는 애정 어린 인물들의 모습이 좋았다. 독서모임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기대하며 맞이한 당일. 기대감은 무너지고 추억은 찢겨나갔다.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작가의 이면을 깨닫고 나서는 더 이상 이 책을 사랑할 수 없었다. 표현력이 대단하다고 감탄하면서 읽은 장면들이 작가의 행적으로 모두 거짓이 되었다. 책과 작가를 분리해서 바라봐도 그 아름답던 문장들이 이제는 감동적이지 않다.
고가연 작가와 작품은 어디까지 분리할 수 있을까?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필독서로 뽑힐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준 작품이다. 하지만 작가는 대단한 인종차별자였고 혐오에 앞장섰으며 자신이 착취한 원주민을 이용해 이 책을 썼다. 과연 우리는 이런 작가의 작품을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걸까? 감동적인 문장을 읽으면서도 계속해서 이 글은 다 거짓이란 생각을 먼저 했던걸 보면 나는 절대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없는것같다.
이 책을 제공하는 출판사와 도서관에겐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독자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것 또한 이들의 의무이다. 내가 이 책을 대출한 도서관과 가장 최근 출간된 책에는 어떠한 설명이 없었다. 최소한 그가 어떤 작가인지 알리는 글을 실었어야 했던 것 아닌가하는 생각에 실망감이 들었다.
단순히 잘못된 책이다, 이런 책은 읽으면 안된다라는 말을 넘어 우린 어떻게 책을 소비해야 하는 것인가 고민이 되게 해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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